강달영과 6.10 만세운동
강달영과 6.10 만세운동.ppt | |
목차 1.강달영 2.6.10만세운동의 시대적 배경 3.6.10만세운동의 계획과 추진 4.6.10만세운동의 전개와 성격
본문 사회주의 운동과 조선 공산당 3.1 운동 실패 후 국민들은 사상적 회의에 빠짐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물결이 조선으로 스며들어 사회주의적 사상은 지식인 들에게 민족해방운동의 또 하나의 이념적 무기로 자리잡았다. 팽배한 사회주의의 이념적 토양위에 1925년 4월 17일 조선 공산당 탄생 (책임비서로 김재봉을 택함)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으로부터 조선 민족을 절대 해방시키기 위하여 조선의 제종 역량을 집합하여 민족 혁명 유일 전선을 작성할 것, 민주 공화국을 건설하되 국민에 의하여 직접 비밀 보통 평등의 선거로 성립한 입법부를 일체 권리의 최고 기관으로 할 것, 농민 노동자 부녀 등의 정치적 경제적 절대 해방과 절대 평등을 보장할 것 . - 1차 조선 공산당 강령, 1925 초기 조선 공산당 책임 비서 : 김재봉 강습소를 열어 농민, 노동자 계몽운동에 앞장 섰으며, 만주일보 기자로 활동 중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기도 함 계몽운동이 조국 독립의 직접적 동력이 되지 못한다는 한계에 봉착, 만인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에 매료됨. 러시아회의에 참석하는 등 러시아의 사회주의를 체화함. 일본 경찰에게 들켜 잡히기 전 강달영에게 조선 공산당 책임 비서 자리를 맡기게 됨 조선공산당 2차 책임비서 강달영 1887년 진주에서 출생 한일 합병 후 비분하야 동지규합에 힘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농민과 청년의 선두에 서서 지도하다 피검 1년 6개월의 일제 구속을 벗어나 1921년 노동공제회 창립에 힘써 간부로 일함 1923 년 조선노동총맹을 결성해 간부로 활동 1924년 공산당내 지부의 당원이 되어 지하운동후 1925년 김재봉의 후임으로 조선 공산당 2차 책임비서로 임명됨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아이스크림과 바나나 장사를 하다가 일경에게 피검되어 옥살이를 함 1932년 출옥 하였지만 옥살이중 생긴 정신병으로 인해 10년을 살지 못하고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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